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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소득 및 배당금의 정당성

기사승인 2021.01.27  09:2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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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시제의(因時制宜)의 관점에서-

정체(政體)의 차이가 정치의 목적에 영향을 주는가? 군주정ㆍ공화정ㆍ귀족정 등 정체(政體)에 따라 통치권의 차이는 존재한다. 그러나 그 목적은 인간다운 삶의 실현이라는 공통점을 갖는다. 따라서 정체의 차이는 방법론의 차이일 뿐 그 근본 목적에는 영향을 주지 않는다

정체와 통치권의 변혁은 왜 발생하는가? 정치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할 때 생긴다. 폭군의 대명사인 걸주(桀紂)를 처단한 것에 대하여 맹자는 인의(仁義)를 해치는 자는 한갓 필부에 지나지 않으니 처단함이 마땅하다고 하셨다. 인의(仁義)를 해치는 이유는 권력자의 탐욕 때문이니 탐욕의 권력을 징벌하여 백성의 인의(仁義)를 실현케 함이 바로 혁명인 것이다.

군주정의 혁명정부가 단행한 첫 번째 사업이 토지개혁이다. 이는 백성의 하늘은 먹고사는 것(食)이므로, 농경시대 모든 백성이 먹고사는 원천이 토지이기 때문이다. 조선의 개국에 그랬고 중기의 개혁론과 실학자의 핵심적 개혁안이 바로 토지제도의 개혁이었으며 위정척사파의 핵심도 바로 그러하였다. 우리 역사는 기득권의 저항으로 개혁다운 개혁을 이루지 못하였음은 이미 알고 있는 역사적 사실이다.

정치는 왜 타락하는가? 중국사에서 정치 타락의 주역은 환관이었으며, 우리 역사의 정치 타락의 주역은 관리였다. 타락의 원인은 탐욕이다. 권력을 기득권자의 탐욕을 채우는 방편으로만 사용한 것이다. ‘하늘이 뭇 백성을 내시니 만물에 법칙이 있다네. 백성이 타고난 떳떳함을 지녔으니 이 아름다운 덕을 좋아한다네.’ 하였으니, 백성이 좋아하는 것을 권력을 잡은 자가 좋아하지 않음에 연유한 것이다. 권력을 잡은 자가 좋아하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환관과 관리의 차이는 무엇인가? 환관은 지식인이 아니다. 그러므로 환관의 권력적 탐욕에 연유한 중국의 타락은 지식인의 각성으로, 혁명이 가능하였기에 왕조의 수명이 단명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 역사는 지식인인 관리의 타락에 연유한지라 각성할 주체가 사라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역사의 왕조는 길고 왕의 타락이 아닌 관리의 타락으로 연유하여 백성의 삶은 더욱 비참하고 애달팠으니, 임꺽정과 홍길동이 일어나 그 아픔을 치유해야만 했던 그 슬픈 역사를 누구에게 말하랴. 백성을 대변할 지식인의 타락으로 무지한 백성의 굶주림(민란)으로 표출될 수밖에 없었으니 그 참상을 어찌 말로 다하랴.

오늘 국회의 실상을 보며 정부의 정책이란 것을 보라. 그 청문회란 것이 ‘성추행’ ‘미투’ 아니면 ‘자식’과 ‘아파트 투기’ 아니면 재산증식을 둘러싼 것이 대부분이다. 또 그 기준 자체가 법조문에 불과하며 묻는 자나 대답하는 자가 피차의 구별이 있을 뿐 큰 차이가 없으니, 국민의 신음과 시대적 문제를 해결할 정책적 대안은 어디에도 없다. 있다 해도 부분적 땜질식 처방에 불과하니 병이 깊어질 뿐이다.

이를 보는 국민 또한 기득권자와 실패한 자로 크게 구별되니 어찌 정상적인 나라라 하겠는가. 정치란 무엇인가? 바로잡는 것이다. 바로잡을 사람이나 바로잡힐 사람이 구별이 없는 세상이 되었다. 이점 환관의 타락과 관리의 타락이 다른 점이니 결국, 우리 역사는 관리와의 결탁 즉 이권과의 결탁 이외는 아무것도 없으니, 또한 망국으로 치닫는 기득권자 그들만의 리그로 전락한 것이다.

여기서 한발 벗어나 진실을 말하고 기득권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개혁론은 설 자리가 없는 것이니 정도전과 생육신ㆍ사육신과 조광조와 이이와 이유태를 거쳐 조선 후기의 실학자와 위정척사파의 진리는 설 곳이 없었던 것이다.

해방 후는 다른가. 얼마나 많은 선각자가 뚜렷한 원인도 없이 죽었는가. 철학이 없는 나라이니 보편적 항구적인 진리는 애당초 기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시대적 진리를 외쳤던 김구, 장준하, 박정희, 노무현, 박원순 등과 민초의 죽음을 어찌 다 헤아리겠는가? 또 역대 대통령과 재벌들의 교도소행이 줄을 이어도 단 한 번도 변한 것이 없음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 당이 그 당이며 그놈이 그놈인 것이다. 오십보백보(五十步百步)이며 피선어차(彼善於此)며 말짱 도루묵이다. 무엇이 대한민국의 본질을 지배하는가. 탐욕이다. 흡사 풍산개와 같다. 한번 물면 결코 놓지 않는다. 그러나 그러한 지독한 탐욕도 역사에서 길이 살아남은 자는 아무도 없다. 권불십년(權不十年), 조선 시대 그렇게 권세를 누렸던 세도가의 자취는 ‘말 맨 자리 똥도 없다.’는 말처럼 말끔히 사라졌다.

한편 구한말, 일제를 거치며 해방의 틈바구니에서 아직도 득세한 감이 없지 않지만 긴 역사의 안목에서 어찌 그들이 살아남을까? 앞으로 절대로 그런 날은 없을 것이다. 이제라도 살아남는 길은 백성이 좋아하는 또는 국민이 좋아하는 직심(直心)인 인륜ㆍ도덕으로 돌아가는 길뿐이다.

농경시대의 혁명이 토지제도의 개혁을 우선으로 하여 모든 백성이 먹고살 토대를 제공했다면 오늘의 시대 양극화ㆍ저출산ㆍ국토의 기형적 발전을 초래한 문제의 해결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조선 시대 개혁론이 조종의 헌장 준수를 기준으로 삼았다면 오늘은 헌법을 기준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대통령 선거를 앞둔 이 시점에 기본소득과 배당금이라는 정책이 관심을 끄는 이유는 일제를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중첩된 정치의 부재(바로잡는 기능)로 말미암아 민생이 파탄에 이르렀기 때문이니 이 또한 탐욕에 기인한 것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이제는 기본소득과 배당금이라는 주장이 과거 군주제 하 혁명정부의 토지개혁과 다름이 없음을 성찰하고 5천만 국민이 최소한 인간다운 삶을 실현하기 위한 정책으로 합당한지 여부와 구체적 실천방법을 논의해야 할 시점에 이른 것이다.

역사적으로 새로운 정책과 대안은 아무것도 없다. 단지 인의(仁義)가 있을 뿐이다. 국가를 논하지 말고 이데올로기를 논하지 말라. 국가의 존재 이유도 이데올로기의 출현 여부도 인간의 삶에 연유할 뿐이다. 모든 학문과 철학과 종교는 인간으로 귀일할 뿐이다. 그 모든 것이 인간의 삶과 인간의 본성인 인의(仁義)를 외면할 때 한갓 탐욕의 도구로 전락했음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군주정에서 공화정으로의 전환을 천명한 대한민국임시정부 100주년과 지방자치 30주년을 맞이한 2021년의 출발선에서 대한민국의 정치지도자와 고위관리와 지식인은 정치란 바로잡는 것이라는 역사적 진리를 깨우치길 바란다.

아울러 이러한 깨우침으로 동방예의지국이며 이 지구상에서 가장 현명하고 지혜로우며 근면한 국민이 사는 대한민국이 세계적인 모범국가로 성장하는 원년이 되기를 기원한다.

 

고주환 논설위원 kjmong147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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