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는 모든 것을 망가뜨린다. 간혹 의로운 분노가 있다고 하지만, 그건 분노가 아니라 문제제기다. 분노는 ‘분개하여 크게 화를 내는 것’이라고 사전은 설명한다. 여기서 분개를 또 설명해야 되겠으나 그냥 건너뛰어도 될 정도여서 다른 설명은 생략한다. 아무튼 분노는 개인적인 차원이건, 사회적인 차원이건 간에 건강에 이롭지 못하다. 개인적인 분노는 삶과 판단력을 훼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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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주환 (전)한국사회복지관협회장 |
우리가 흔히 경험하는 것이기도 한데, 분노를 쏟아놓은 이후에는 후회일색이고 결국에는 몸을 조아려야 하는 형편에 놓이게 된다. 분노가 없는 삶이야말로 역동성이 빠져나간 삶이라고 억지를 부리는 사람도 있지만, 분노는 사람을 엇길로 인도할 뿐이다. 사회적 분노라는 것도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함성일 때 의미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세상을 온통 진흙탕 싸움판으로 만들 뿐이다.
분노의 가장 큰 문제는 사람을 ‘정서적 고갈 상태’에 빠트리는 것이다. 정서적 고갈 상태는 정서적으로 피폐한 상태를 일컫는다. 이렇게 되면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한다. 폭발해버린 자신의 감정에 매달려서 헐떡이게 된다. 오로지 분노에 이르게 만든 사람이나 상황을 증오할 뿐이다. 다른 건 중요하지 않다. 조건이나 전제도 불필요하다. 심지어는 사실이나 진실도 외면해 버린다. 객관적인 분석이나 평가는 아예 저 끝으로 밀어버린다.
특정인을 싫어하는 사람들의 분노가 가지는 특징이 이렇다. 그들은 특정인의 이름만 들어도 쌍욕부터 입에 걸친다. 무조건 싫다고 핏대를 세운다. 간혹 이유를 들먹이는 사람도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것도 다른 사람이 꾸며낸 가짜뉴스를 이유라고 내세운다. 다른 이야기는 모두 거짓이라고 단정해 버린다. 스스로 지옥에 떨어진 것이다.
요즘 청문회 정국을 보면서 분노가 치밀어 올라 못 살겠다는 사람들이 많다. 그냥 화가 치미는 정도를 넘어 화가 머리끝까지 뻗쳐서 숨쉬기마저 곤란했다는 사람을 만난 적도 있다. 정치인들은 국민의 정서를 자극해서 분노를 키우는 선수들인 것 같다. 온갖 추잡한 의혹들을 제기한 다음에 ‘아니면 말고’를 거듭한다.
국민들은 그들의 야바위에 속아서 거품을 물고 욕설을 퍼붓는다. 정치인들이 말하는 소위 공분(公憤)에 기꺼이 참여한다. 그런 것을 사회적 분노라고 부를 수도 있겠으나, 앞에서 잠깐 언급한 것처럼 그것은 속임수일 뿐이다. 이런 현상을 ‘분노의 정치적 동원’이라고 부른다. 국민들의 감정을 정치적으로 악용하는 것이다. 대안의 마련보다는 어쨌건 파국을 의도한다. 그것이 엇나간 사회적 분노의 실체다. 엇나간 사회적 분노는 혐오와 배제를 일상화한다.
말끝마다 ‘부아가 나서 못 살겠다’는 말을 달고 사는 사람들이 많다. 원래 부아는 ‘폐’를 의미하는 순우리말이라는데, 화가 나면 숨이 가빠져서 그렇게 연결된 듯하다. 분노와 같은 레벨은 아니지만 ‘짜증나서 못 살겠다’는 사람도 많다. 그런데 이 짜증과 부아는 쉽게 분노로 연결되고, 그 분노는 수직으로 상승하면서 과잉분노로 귀결된다. 개인도 그렇고 사회도 다르지 않다.
특히 분노를 정치적으로 동원하는 자들이 문제다. 그들은 목소리가 크고, 어법도 자극적이다. 같은 표식을 달고 몰려다니기를 좋아한다. 분노의 유지를 위해 가짜뉴스의 양산을 마다하지 않는다. 토론이나 경쟁이 발붙일 여지는 없다. 단죄와 처벌이 있을 뿐이다. 이런 분노는 온천지를 수렁으로 만들 뿐이다. 과잉분노는 개인을 피폐하게 만들고 사회적 신뢰를 무너뜨린다. 배려와 존중이 필요한 때다.
손정임 기자 sjo5448@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