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은 삼국시대부터 지켜온 명절이다. 그만큼 오래된 명절이다. 예전에는 이때가 한 해의 농사를 마무리하고 온갖 곡식을 수확하는 시기이므로 추석이 추수감사절이었던 셈이다. 그래서 지역마다 예식과 놀이가 다양했던 모양이다. 문헌에 의하면, 음력 8월15일인 추석 아침에는 햇곡식으로 만든 음식과 함께 제사를 지내고 조상의 묘소를 돌아보는 성묘를 한 후에 온 동네가 모여 축제를 즐겼다고 한다.
하지만 요즘의 추석은 고속도로의 교통체증이 먼저 생각난다. 또 돈과 선물이 오가는 부담스런 명절이 된 것 같기도 하다. 그래도 친인척들이 한자리에 모일 수 있는 즐겁고 복된 명절인 것만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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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주환 (전)한국사회복지관협회장 |
이런 명절에 친척들이 만났다가 얼굴을 붉히고 돌아서는 일이 더러 있다. 안부를 묻는답시고 상대방의 형편을 헤아리지 못한 말들을 늘어놓아서 마음을 아프게 하는 무례가 적지 않다. 이른바 ‘푼수 빠진 잔소리’가 많은 것이다. ‘결혼은 언제 할 거냐, 아직도 취직이 안 되었냐, 월급은 얼마나 되냐, 집은 몇 평이냐, 얼굴은 왜 그렇게 상했냐’는 등의 물음이 그것이다.
나쁜 의도로 그러는 것은 아니다. 걱정과 염려가 담긴 물음이고, 좋은 일들을 기원하는 마음이 담긴 물음이긴 하다. 그러나 듣는 사람에게는 고문 같은 추궁으로 들린다. 이번 명절에는 무조건 격려와 축복이 담긴 말들만 주고받기를 기대한다.
정치 이야기도 ‘가려서’ 해야 한다. 정치에 관심이 아예 없으면 안 되지만, 명절에 만난 친척들끼리 서로 다른 정치성향을 무작정 노출할 필요는 없다. 목소리가 높아지면 토론이 아니라 싸움으로 번지기 십상이다. 지금 우리나라의 정치상황이 그리 좋지 않은 건 사실이다. 집권층의 무능과 부도덕이 나라의 형편을 어렵게 하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오랜만에 만난 친척들이 열변을 토한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별로 없다. 그런 일을 가지고 핏대를 세워봤자 ‘허공에 내지르는 주먹질’에 그칠 뿐이다. 정치성향이 비슷한 친인척끼리 모인 장소라면 몰라도, 웬만하면 정치 이야기는 총론 수준에서 그치는 게 좋다.
현직에 있을 때, 명절이 아주 싫다는 젊은 친구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부모님을 따라나섰다가 친척들로부터 청문회를 경험해서 따로 여행을 떠나고 싶다는 하소연도 들었다. 그때마다 친척들이 모이는 명절에 빠지면 안 된다고 다독이면서, 잔소리에 지혜롭게 대응하는 ‘화제 전환 기술’ 몇 가지를 전수해 준 기억이 있다.
사람들이 모이면 생각 없는 말이 많아지고 그 말은 여러 사람의 가슴을 들쑤셔서 뜻밖의 상처를 만들게 된다. 원래 잔소리는 크게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면서 불쾌감만 키운다. 그렇지 않아도 살기 힘든 판국이다. 위로하고 격려하고 축복하는 말들로 추석밥상이 채워졌으면 좋겠다.
손정임 기자 sjo5448@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