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주 월요일에 장자(莊子)를 공부하고 있다. 함께 공부하는 분들이 신실한 분들이어서 좋기도 하지만, 깨달은 바를 서로 나누는 시간이 있어서 그 시간에 배우는 것이 많다. 얼마 전에는 장자의 ‘추수’편에 있는 관점(觀點)이 화두였다. 황하강의 신인 하백과 바다의 신인 북해약이 나누는 대화를 보면, 위치가 관점을 정하고 그 관점에는 한계가 명확하다는 구절이 나온다.
![]() |
최주환 (전)한국사회복지관협회장 |
‘우물 속에 있는 개구리에게 바다에 대해 말해도 소용없는 것은 그 개구리가 살고 있는 곳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고, 여름 벌레에게 얼음에 대해 설명해도 별수 없는 것은 그 벌레가 살고 있는 계절에 집착되어 있기 때문이며. 재주가 하나뿐인 사람에게 도(道)에 대해 말해도 통하지 않는 것은 그가 받은 교육에 얽매여 있기 때문이다’라는 대목이다. 경험이 관점을 정한다는 뜻이 담겨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얼굴만큼이나 다양한 생각들이 존재한다. 다양한 생각들에는 나름의 논리가 있고, 논리에는 축적된 경험들이 배경으로 작용한다. 그렇다면 그 논리가 보편성과 절대성을 가질 수 있을까. 논리를 주장한 사람에게는 의미가 있을지 모르나 다른 사람들에게는 관심 밖의 일이거나 귀찮은 잡설인 경우가 태반이다. 그런데도 자신의 경험에 유사한 사례를 덧붙이고 옛사람의 말을 짜 맞춘 다음 절대적인 값어치가 있는 것처럼 강변한다.
자신의 위치와 경험의 내용을 정확하게 알고 있다면 그러지 않을 것이다. 자신의 인식이라는 게 자신이 서 있는 위치와 경험에 기인한 것임을 아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관점이 안고 있는 근원적인 한계를 인정하는 것이 먼저다. 그러지 않으면 우물 속에 있는 개구리가 바다는 없다고 주장하는 궤설과 다를 게 없다.
정동호 교수는 ‘니체’라는 책에서 니체를 바르게 만나는 방법을 설명하다가 ‘황희 정승’의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정승 댁 하녀들이 손님을 맞으려면 음식을 먼저 장만해야 한다는 쪽과 청소부터 해야 한다는 쪽으로 나뉘어 다툼이 생겼다. 음식을 먼저 해야 한다는 하녀가 정승에게 묻자 ‘네 말이 옳다’고 했다. 득달같이 청소부터 해야 한다는 하녀가 달려와서 청소가 먼저라고 했다. 그러자 ‘네 말도 옳다’고 했다.
이를 지켜보던 조카가 ‘이도 옳고 저도 옳다면 무엇이 옳은 일입니까?’라고 묻자 ‘듣고 보니 네 말도 옳구나’라고 했다. 답답하게 여긴 부인이 나섰다. ‘아랫사람들이 다투는데 명확하게 가름도 못하면서 나랏일은 어찌하십니까?’라고 했다. 부인의 이야기를 들은 정승이 ‘당신의 말도 옳구려’라고 답했다. 섣부른 판단을 경계해야 한다는 의미가 담긴 예화다.
사회복지관장으로 재직할 때는 사회복지와 관련된 책만 보았다. 옳고 그름도 사회복지를 기준으로 삼았다. 그러다가 은퇴해서 다른 책들을 보니 우물 안의 개구리였다는 생각이 든다. 사회복지에 관한 책들이 잘못됐다는 것이 아니다. 위치를 사회복지에 맞춰놓고 보니 관점이 옹색하거나 전망이 선명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은퇴한 이후에 독서모임에도 나가고 정기적인 학습모임에도 열심히 참여한다. 사회복지에 관한 모임이 아니다. 동양의 고전을 읽고 생각을 나누는 모임이다. 모임에 참여하면서 생각이 트이는 경험을 자주한다. 위치를 탄력적으로설정해서 폭넓은 관점을 만나게 된 것이 제일 감사하다. 물론 아직도 부족하다. 다만, 어느 하나에 붙잡히지 않아야 한다는 깨달음은 크고 분명하다. 이런저런 위치에 서보면서 다양한 관점들을 즐겁게 만나봐야겠다.
손정임 기자 sjo5448@naver.com